새벽 큐티가 끝나면 잠시 뉴스를 보며 휴식을 취하다가, 8시경 나의 오전 첫 시간은 헬라어 성경을 읽는 시간이다. 작년에 신약을 다 읽은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이제 두 번째 읽기를 시작하여 오늘 아침에는 마태복음 27장을 읽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례를 읽으면서 설명절과는 어울리지 않게 마음이 경건하고 엄숙해졌다.
특히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 지냄을 읽는 중에 '자신의 새 무덤에'가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요셉, 그는 아리마대라는 동네 출신이다. 중세의 대 신학자 토마스는 아퀴노 출신이라 토마스 아퀴나스로 불리듯이 요셉도 출신지를 붙여서 아리마대 요셉이라 불렸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마가복음에는 '그는 존경받는 공회원'이라 했고, 누가는 '공회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했으며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자는 공회의 결의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했으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다. 실로 그는 그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요 정신적인 지주였다.
나아가 요한은 그가 예수의 제자라고 했다. 그러나 공회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경향이 예수를 비판하고 죽이려는 것이기에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겼다. 그는 소위 '숨은 제자'였다.
그런데 자신의 뜻과는 달리 공회가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 때 그는 골고다로 가서 예수님의 고난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관하던 중 그의 믿음은 뜨겁게 불타 올랐고 확신으로 가득 찼다. 이 확신은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상황상 아무도 예수님과 관계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다 도망간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는 당돌히(took courage) 총독에게 나아가 시신을 달라고 요구한다. 더 이상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기에 자신의 믿음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남의 눈은 더 이상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시체를 깨끗한 세마포에 쌌다. 그리고 바위에 판 새 무덤에 안치했다.
그 당시 가난한 자들은 평토장을 했다. 웬만한 사람들도 새 무덤에 장사되지 못하고 중고무덤에 장사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위에 판 새 무덤에 장사했음은 요셉이 큰 부자임을 알 수 있다. 이사야가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 53:9)하고 예언한 대로였다.
여기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있으니 그는 그냥 남의 새 무덤을 사서 예수님을 장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새 무덤에 '예수를 장사했다는 점이다. 당시 부자들은 자기들이 죽어 묻힐 무덤을 미리 준비해 둔바 요셉도 그리했다. 한 번도 누인 적이 없는 새 무덤을 준비해 두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께 드렸다.
이것은 더 이상 예수님께 아무것도 아낄 것이 없음을 보여준다. 예수님과 자신이 동일시된다. 갈라디아서 2:20의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요즘 자주 듣게 되는 복음송과도 궤를 같이 한다.
http://www.ccmm.news/news/articleView.html?idxno=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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