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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홍정환 칼럼]「일상에 찾아온 창세기」엉터리 숨바꼭질(창세기 3장)

by 교회네트워크신문 2022. 10. 30.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에게는 인간을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으셨다. (…) 당신의 자녀들이 돌이키길 간절히 원하는 아버지의 부르심 앞에서 오늘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하고 있을까?

숨바꼭질 (ⓒ일러스트 김상식)

언젠가 교회 사무실에서 겪은 일이다. 너덧살 쯤 된 여자아이가 나를 찾아왔다. 엄마를 따라왔던 그 아이는 교회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자기와 놀아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아이의 바람과 달리 교회에는 바쁜 어른들만 가득했다. 말 한 마디 건네기가 무서울 정도로 급히 움직이던 어른들 틈에서 아이는 결국 나를 찾아왔다.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얘야, 나도 지금 무척 바쁘단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독서 때문에 바쁘다는 말을 믿으려하지 않는다. 어른의 눈에도, 아이의 눈에도 책 읽는 사람은 늘 한가해 보이기 마련이다.

아이는 함께 놀아줄 것을 아주 당당히 요구했다. 나는 책장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며 슬쩍 치밀던 화를 억눌렀다. 그리고 명랑한 목소리로 무슨 놀이를 하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아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숨바꼭질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치솟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물었다. “누가 먼저 술래가 되면 좋을까? 내가 먼저 숨을 테니 처음엔 니가 술래가 될래?” 이번에는 대답이 아주 빨리 돌아왔다. “제가 먼저 숨을께요!” 나는 책상에 엎드린채 최대한 진심으로 말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잠시 후 나는 부푼 기대를 안고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 너무나 완벽하게 숨었을 테고 나는 결코 아이를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머리카락이 조금 보이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게 틀림없었다. 나는 계속 아이를 찾지 못해 결국 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보고야 말았다. 머리카락이 아닌 머리전체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봐 황급히 고개를 돌린 후, 나는 작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디 갔지? 정말 못 찾겠네.” 내 목소리를 들은 아이는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안 들린다! 난 지금 아무 것도 안 들린다!’ 그리고는 다시 아이를 찾는 시늉을 반복했다. 숨바꼭질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창세기는 이와 비슷한 엉터리 숨바꼭질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태초의 아름다움과 당당함은 간곳없는 비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무의미한 시도였다. 대체 누가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을 수 있을까?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재판정의 법관이 판결문을 낭독하듯 하나님은 두 사람과 뱀에게 준엄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창세기 3장은 아름답고 찬란한 앞의 이야기들과 달리 어둡고 안타까운 분위기로 새로운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타락 이야기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왜 인간은 아름답게만 살아갈 수 없는 걸까? 대체 왜 태초의 찬란함을 잃어버리고 악과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살게 된 걸까? 창조의 한 몫이었던 ‘일’이 왜 이렇게 지겹고 힘들기만한 것이 된 걸까?

이런 질문 앞에서 창세기는 먼저 영적 실재(spiritual reality)로서의 사탄을 말하고 있다. 뱀으로 표현된 사탄은 능수능란하게 여자를 유혹했다.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사탄의 기술은 그때나 오늘이나 정말 놀랍다. 하지만 하나님은 뱀의 유혹을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뱀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뱀이 흔한 지역에 살았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리고 뱀을 볼 때마다 악의 실재와 하나님의 심판을 생생히 상기했을 것이다. 뱀과 여자의 후손에 대한 말씀은 인류의 역사와 삶속에 현존하는 사탄에 대한 묘사이며 사탄과 인간의 오랜 투쟁에 대한 묘사이다. 사탄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 삶의 실재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우리 삶 속 어둠의 모든 원인을 바깥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인간은 책임지기보다 책임 떠넘기기를 즐겨한다. 창세기의 남자와 여자도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떠넘겼다. 그리고 은근히 하나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돌려 말했다. 하지만 창세기는 문제의 원인이 인간 안에도 있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문제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였을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에 지어진 피조물이면서도 하나님처럼 되려했다.

하나님은 흡사 재판장과 같은 엄위로움으로 인간의 타락을 처리하셨다. 창세기 3장은 타락의 경위를 설명한 후 하나님의 심문과 판결 과정을 묘사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사탄의 유혹에 굴복한 인간의 문제를 반드시 다루는 공의로운 분이시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심문과 판결의 내용은 물론 하나님의 사후조치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다.

자신의 선택으로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인간은 심각한 곤경에 처했다. 무화과 잎을 엮어 만든 치마 같은 임기응변은 인간을 이러한 곤경에서 구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다. 하나님은 엄위로운 심판자인 동시에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분이셨다.

어쩌면 우리도 창세기의 남자와 여자처럼 술래의 눈에 훤히 보이는 엉터리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주일에 잠깐 하나님을 만나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주일 하루 교회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니었다. 모든 시간과 공간의 주인인 하나님은 내 삶 전체를 바라보며 질문하셨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의 물음을 들으며 나는 어린 시절 들었던 어머니의 질문을 떠올렸다. 내가 뭔가를 잘못했을 때 어머니는 회초리를 든 채 “잘못했어, 안했어?”라고 물으셨다.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는 동안 어머니는 애꿎은 방바닥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리셨다.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질문에는 아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키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깔려있었다.

하나님도 그런 마음으로 인간을 부르셨던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출산의 고통을 주신 동시에 새 생명을 약속하셨고, 일의 고통을 말씀하신 동시에 그 대가로 먹거리를 얻어 생을 이어갈 것을 약속하신게 아닐까? 무엇보다 하나님은 무화과 잎사귀로 엮은 얄팍한 옷 대신 튼실한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다.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에게는 인간을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으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을 이렇게 변주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사 1:18-20)」

아담과 하와는 이 질문 앞에서 변명하기 급급했다. 여자와 뱀, 나아가 하나님께 책임을 떠넘기려들었다. 당신의 자녀들이 돌이키길 간절히 원하는 아버지의 부르심 앞에서 오늘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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