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사람이 타락해서 받게 된 벌이 아니었다. 일은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 그 자체라고 창세기는 외친다."
고백을 하나 해야겠다. 나는 오래전부터 몽마르뜨 언덕의 거지로 살아가는 장면을 종종 상상해왔다. 상상 속의 나는 사르트르의 소설 <자유의 길>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절반쯤 먹다 버린 바게뜨 덩어리를 외투 바깥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었다. 배고플 때마다 조금씩 뜯어먹기 위해서였다. 나는 무위도식(無爲徒食)을 꿈꿨다. 넥타이를 매고 정해진 시간에 기계처럼 출퇴근하는 것보단 그런 삶이 훨씬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조금만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알 수 있다. 다들 한 번쯤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말이다. 일은 누구에게나 고단한 법이다. 아무리 즐겁게 해오던 행동도 그것이 일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즐거움은 절반, 아니 반의 반으로 줄어든다.
이것은 비단 현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까마득한 고대에도 사람들은 일하지 않는 삶을 꿈꿨다. 고대인들에게 낙원이란,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마실 것이 풍성하게 주어지는 곳이었다. 낙원에 대한 이런 묘사는 각기 다른 민족의 신화와 전설에 비슷비슷한 형태로 변주된다. 일에 대한 인류의 두려움은 정말로 뿌리 깊은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가끔 일에 지친 사람들은 낙원에서 쫓겨난 사건을 생각하며 아담과 하와를 원망하곤 한다. '그들이 어리석게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에덴동산에 살고 있었을 텐데…'라고. 잃어버린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고된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을 더욱 가라앉게 만든다. 그러나 창세기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른 신화들은 낙원을 놀고먹기 좋은 곳으로 묘사하지만, 창세기는 우리에게 낙원은 그런 곳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본문은 우선 창세기 1장에서 들려주었던 천지창조 이야기를 간략하게 되풀이 한다. 하늘과 땅의 이야기가 인간 삶의 배경을 이루었을 때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사람을 네 개의 강이 흐르는 낙원 에덴동산에 살게 하시며, 그 안에서 먹어도 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가르치셨다.
에덴동산은 물이 넘쳐흐르는 곳이었고, 먹을 것이 풍성한 곳이었다. 단지 한 종류의 열매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자유롭게 허락된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었다. 언뜻 봐선 에덴동산도 다른 신화의 낙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에덴동산을 모든 것이 갖춰진 휴양지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창세기가 묘사하는 낙원은 휴양지가 아니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기 직전, 땅을 갈아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서 초목과 채소가 아직 땅에 자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슬쩍 들려준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흙을 빚어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경작하게 하시려고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의도는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킬 사명이 사람에게 있음을 말씀하시는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사명, 곧 땅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사명은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오직 하나님이 직접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사람, 하나님의 숨결 속에서 태어나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누리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사명이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이다. 일은 사람이 타락해서 받게 된 벌이 아니었다. 일은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 그 자체라고 창세기는 외친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에서 사람은 무슨 일을 했을까?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들짐승과 새를 아담에게로 보내셨다. 아담은 자신을 찾아온 모든 생물들을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창세기는 아담이 부른대로 각 생물의 이름이 붙여졌다고 말한다. 사람의 첫 번째 일은 다름 아닌 이름 짓기였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름 짓는 일을 맡기셨고 그 사람이 지은 이름, 즉 맡기신 일의 결과를 인정해주셨다.
왜 하필 이름 짓기였을까? 이름 짓는 것이 사람의 첫 번째 일이었다는 사실은 사람이 하는 일의 존귀함을 깨닫게 한다. 이미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낮과 밤, 하늘, 그리고 땅과 바다에 이름을 붙여주셨다. 이름 짓는 일은 그 자체로 창조의 한 부분이며 피조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아담은 이름 짓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에 동역자로 참여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의 동역자로 만드셨다. 하나님과 더불어 창조세계를 완성하고, 피조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로 사람이 만들어진 것이다. 때문에 일은 저주가 아니며 낙원은 놀고먹는 곳이 아니다. 창세기는 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정면으로 반대한다.
우리는 매일같이 반복하던 고된 일을 통해 이미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고 있었다. 수많은 일 속에서 기쁨을 잃고 허탈해할 때도 많았지만, 하나님은 한결같이 우리의 창조행위를 바라보고 계셨다. 비록 보수가 적고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동역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창세기의 빛 아래에서 우리의 일은 원래 모습을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창세기는 일의 고귀함을 말하는 동시에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님은 아담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자가 혼자 사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어야겠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에게 반드시 채워져야할 무언가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자를 만드시고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남자와 여자의 신비한 연합은 일로 결코 채워지지 않는 삶의 본질적 영역을 충만하게 채운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던 아담의 말은 다른 생물들에게 이름을 붙일 때, 즉 일을 할 때는 볼 수 없었던 감탄이었다. 이들의 친밀함에는 당신을 ‘우리’라고 일컬으시던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아름답게 재현되고 있다.
각기 몸뚱이를 가진 두 사람이 한 몸으로 불리우는 신비로운 일체감 속에서 그들은 가진 것 없이 벌거벗은 채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사람은 바로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맛보게 된다. 하나님이 관계 가운데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공동체의 기쁨을 잘 아는 분이시기에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과 사람의 하나됨을 만드셨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과 사람이 관계 맺고 친밀감을 경험하는 방식의 원형을 보여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과 남녀의 하나됨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을 구원이라고 부른다. 구원의 원형은 일의 자리인 일터에서, 그리고 부부가 살림하며 살아가는 삶터에서 경험되는 것이었다. 창세기 2장은 일, 삶, 구원(1391)의 신앙을 우리에게 권한다.
물론 일은 지금도 여전히 지겹고 힘들다. 관계 속에서도 외롭고 부끄러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왜 이런 비극이 찾아왔는지에 대한 대답은 창세기 3장에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최소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새로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금 일터에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아가기를 기도하자. 또한 삶 터 된 가정 속에서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경험하자.
* 글쓴이 홍정환 목사는 부경대학교 일반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교육학)하고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M.Div)했다. 저서로 제36회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우수상을 수상한 <호당 선생, 일상을 말하다>가 있으며, 역서로는 <공동선을 위한 독서: 책은 어떻게 교회와 이웃의 번영을 돕는가>(이상 죠이북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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