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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소식

[역사칼럼] 울산 서부지역 모(母)교회가 된 언양제일교회

by 교회네트워크신문 2024. 6. 19.
울산 언양제일교회 전경

3. 언양제일교회 설립과정

왕길지 선교사 또한 1901년 4월 11일 울산을 처음 방문한 이래 1903년까지 이 지역을 네 차례 방문하고 전도 및 양육을 시행하고 수세 예정자를 교육하고 세례식을 거행했다. 이 일에 대해서 이희대와 박 서방(1901.4.4)과 왕길지가 1901년 4월 11일에서 17일까지 울산과 병영을 처음 방문했는데, 1901년 4월 11일자 일기를 보면 마부를 고용하여 말을 타고 김 서방과 함께 부산을 떠나 동래를 거쳐 서창에 도착하여 1박하고, 4월 12일 지동골과 태화강을 지나 1시 30분경 울산을 통과하여 2시 30분경 병영에 도착했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울산을 1시 30분에 지나서 2시 30분에 병영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울산과 그 주위의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집으로 갔다. 우리들은 환대를 받았으며, 호기심 많은 구경꾼들이 돌아간 뒤에 우리 숙소에 자리를 잡았다.
이상규, 『왕길지의 한국선교』 (서울: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2017), 250.

병영에서 체류한 4월 13일 일기에서는 병영에서의 군인들의 훈련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저녁부터 비가 내렸다고 말하고 있으나, 14일 주일에는 병영교회에서의 예배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주고 있다.

비 때문에 병영에 사는 사람들만이 집회에 참석했다. 나는 매주일 아침 예배 시간 전에 글공부를 하도록 주선하였는데 아주 늙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 책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들이 공부할 때 보이는 그 열심은 놀랍다. 한 여성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지성적인데, 찬송가의 글을 따라 읽어 혼자 글을 깨우쳤다.
예배 후 오후에 세례를 신청한 사람들을 시문(試問)하였고 세례 지원자 반(班)을 만들었다. 15명이 대상인데 날씨 때문에 참석치 못한 4명은 다음에 시문할 것이다. 이곳에서의 어려움은 그들을 가르칠 사람 역시 세례 지원자라는 점인데,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으므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가르침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 가능한 한 자주 올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이 진리를 이해하는 한 그들의 신앙이 건전할 것임을 안다. 특히 기본적인 사랑에 있어서 그들은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다. 저녁에 기도 모임을 가졌다. 사실 우리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가정 예배를 드리는데 교인 중 몇 명도 거기에 참여한다.
이상규, 『왕길지의 한국선교』, 251.

4월 15일 월요일에는 비가 왔으므로 집 안에서 보내고, 16일에도 날씨가 좋지 못해 기동하지 못했다. 17일 오전 7시 20분에는 병영을 떠나 12시경 동해안의 어촌인 목섬(Mok Soom)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소수의 사람이 모여 저녁 기도 모임을 가졌다. 이곳에도 소수의 신자 혹은 구도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월 18일에는 남창, 주전, 기장을 거쳐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가 울산지방을 두 번째로 방문한 때는 약 한 달이 지난 1901년 5월 24일이었다. 이때의 여행은 부산을 떠나 초읍, 서창, 지동골을 지나 병영에 도착했다. 왕길지의 5월 25일자 일기를 보면 이날 병영의 모든 신자를 만났고, 장터에서 브라운의 어학 선생이었던 고 서방을 만났다고 한다. 주일인 이튿날에는 예배드리고 세례준비반을 교육했다고 한다. 이 날 일기는 다음과 같다. 

오늘 많은 사람이 모였다. 날씨가 좋았으므로 먼 곳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올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열심히 배웠다. 아직 그들은 세례준비반에 들어가서, 최종적으로 세례받기를 원한다는 그들의 열망을 표현하기를 조금 망설인다. 지난번에 참석하지 않았던 두 여성이 세례준비반에 들어왔다. 신청했던 사람들 중 몇 명은 그 문제를 좀 더 생각해보고 싶다고 하며 철회하였다.
박 서방 자신은 대구에 갔으므로 참석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전날 저녁에 인근 마을에 도착하여 그날 돌아왔던 것 같다. 그는 선교사가 울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에 왔다. 그의 행복한 기쁨에 다른 사람들까지도 감화되었다.
이상규. 『왕길지의 한국선교』, 258

병영에 사는 모든 신자들이 회집한 가운데 예배를 드린 후 월요일 아침, 곧 5월 27일 월요일 병영을 떠나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감포, 장기, 그리고 두 지역(Chat tey, Tisu)을 경유하여 경주까지 갔다가 다시 하부 길에 언양을 지나 부산으로 돌아갔다. 

울산지방을 세 번째 방문한 때는 1902년 3월 28일이었다. 3월 28일 부산을 출발하여 동래, 기찰, 서창, 지동골, 울산을 지나 병영에 도착했다. 3월 28일자 일기에서 왕길지는 이렇게 썼다.

이곳의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반가워했다. 우리가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사람씩 와서 우리에게 인사하고 우리가 온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말했다. 지난번에 이곳을 다녀간 이후 5달 만에 왔는데, 여러 가지 일로 이곳에 좀 더 일찍 오지 못했다. 세례 지원자들을 세례받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상규, 『왕길지의 한국선교』, 272.

3월 29일(토)일자 일기에서 이렇게 썼다.

출석자 명부를 살펴보고 또 다른 일들을 챙기며, 또 내일 예배를 준비하며 하루를 보내었다. 오후에는 팔려고 내놓은 집을 보러갔다. 그 집은 남쪽지역에서 이제껏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좋고, 또 외국인들도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지어진 주택이었다.
내일의 일을 줄이기 위해서 나는 조력자와 함께 세례 지원자들을 시문하였다. 늙은 여자들까지도 주기도와 십계명 및 사도신경을 외울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구원의 지식과 성례의 의미 그리고 간단한 교회의 통치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한 여성만이 구원의 섭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례가 늦추어져야 하였다. 또 한 청년이 모친과 싸워 세례가 늦추어지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도 역시 세례 지원자인데 그 은총에 참여할 마음의 평화가 없기 때문에 세례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우리의 회의를 마치니 11시였다.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3월 30일 주일은 부활주일이었는데, 학습과 세례 지원자를 문답하고, 세례와 성찬식을 거행했다. 이날 일기는 아래와 같다.

밤새 많은 비가 내렸으며, 아침에도 계속 비가 내린다. 사람들이 도착하자마자 세례 받을 사람과 학습 받을 사람을 시문하였다. 오전에 날씨가 개였으므로 나는 성례를 오후로 연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아침 예배 때는 요한복음 20:1∼10을 본문으로 택하였다. 두 예배 중간에 몇 명의 사람들이 더 왔으며, 그들도 역시 시문을 받았다.
3시에 오후 예배를 시작하였다. 먼저 나는 12명의 어른들에게 세례를 주고 다음에 4명의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어린이들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그 후에 세례를 받은 신도들에게 주의 만찬을 집전하였고 마지막으로 9명을 세례 지원자로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지금까지 세례교인 수는 13명이 되었다. 장 서방의 부인은 예전에 군산에서 한국 남부지역 미국장로교 선교단의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었다. 14명의 세례지원자 중 2명이 날씨 때문에 참석치 못하여 세례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5명의 세례 받은 어린이 중의 1명은 장 서방의 아들로 이미 군산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밖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여러 가지 질문도 하였다. 이들은 8개 지역의 주민들이다. 다음번에 이곳을 방문하면 오늘 참석하지 않을 몇 사람을 세례 입문자를 받아들일 것이다.

울산 병영을 네 번째 방문한 때는 1902년 12월 11일이었다. 밤늦게 이곳에 도착하여 12월 12일 토요일에는 주일을 준비했고, 12월 13일에는 네 사람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아침 예배에는 비록 적은 성도들이 모였지만, 교회에 나오는 것을 망설이던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좋은 참석률이었다. 중간에 세례 입문반 지원자와 세례 지원자를 문답하였는데, 오후 예배시에 네 명의 여성이 세례를 받았고, 열세 명의 교인이 목회자와 함께 주의 식탁에 앉았다. 세밀히 조사한 후에 몇 명의 세례 준비자들을 명부에서 제명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임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 후 금천, 학동, 서생, 안평 등을 거쳐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번 여행에서 왕길지 선교사는 아홉 지역을 방문하였고, 열두 명의 세례 지원자를 얻었다. 

4. 나가는 말

울산지역에는 왕길지 선교사를 비롯한 순회 전도자들의 전도의 결실로 세워진 교회가 많다. 언양제일교회 외에도 여러 교회가 세워졌는데, 심지어 울산지역의 반대편에 있는 울산 울주군 온산면 학동리에도 새로운 신앙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이런 놀라운 순회전도의 결과로 울산과 인근 지역에 믿은 자들이 생기게 되고, 1895년 10월에 설립된 울산 병영교회에 이어 인근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울산제일교회(1906), 반천교회(1907), 보은교회(1907), 상북교회(1907), 월평교회(1907)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복음 운동이 오늘의 울산지역에서의 교회 탄생의 산실이 되었다. 교통이 불편했던 한반도의 변방에도 끊임없는 방문과 순회 전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초기 선교사들과 전도자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참고자료
- 이상규. 『왕길지의 한국선교』
- 울산교회사연구소, 『울산지방 기독교125년사』 
이석배 목사는 예장합동 순례자교회 담임이다. 고신대교(B.A), 총신대학교대학원(diploma),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Th.M), 계명대학교대학원(Ph.D), 현재 울산교회사연구소 편집국장과 울산순교자기념사업회 자문위원 등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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