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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석배 역사칼럼] 복음의 연쇄반응을 일으킨 선교사 안의와(安義窩)

by 교회네트워크신문 2023. 9. 7.

하나님 말씀의 능력은 참으로 생명력이 있고 활력이 있다 (히브리서 4:12).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우리 속담도 있지만,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은 온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답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사람의 영혼을 울리고 변화시켜 구원해주는 능력이 있다. 그 사실이 울산교회사에서 가장 놀랍게 나타난 증거는 다름 아닌 은편교회 설립을 이룬 안의와 선교사의 복음 전파이다.

왜냐하면 안의와 선교사는 은편리 지역에는 온 적도 없는데(물론 안의와 선교사는 입국 초기에 어학 선생과 함께 부산, 울산, 김해 등 남부지역을 순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는 울산지역의 교회설립과 전혀 상관없는 때였다. 필자 주), 그가 외지(대구)에서 전한 복음을 받은 자(김대영)가 자기 고향 은편리에 돌아와서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안의와 선교사(1867.5.2.~1929.6.25.)

안의와(Adams, James Edward)는 미국 인디애나주(州)의 인디안 지역인 메코이(McCoy)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성장해서 와슈번대학을 졸업하고, 존스홉킨스대학에 진학하였다가 1890년에 누나 애니 로리가 윌리엄 베어드와 결혼하여 한국선교사로 떠나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목회와 해외선교를 결심하고 다니던 학교를 중퇴, 매코믹신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했던 1893년의 12월 27일에 넬리 딕(Nelli Grant Dick Baird) 양과 결혼한 후 1년간 토페카에 살다가 1895년 5월 29일에 한국 선교사로 북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내한하였다. 한국에 있을 동안, 대구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20년간 사역하면서 무려 30여 개가 넘는 교회를 세웠다. 그러므로 ‘대구와 경북지방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게 되었다. 1897년 가을, 선교부 자택에서 몇몇 선교사 가족과 함께 시작한 대구 남성교회(현, 대구제일교회)는 점점 성장해서 대구지방의 모(母) 교회가 되었다.

 

1900년에는 북장로교 한국선교회 회장을 역임했다. 1901년 1월에는 대금으로 대구지방 남자사경회를 10일간 개최하여 참석자 15명 가운데 11명이 학습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사경회는 연례행사가 되어 점점 늘어났는데, 1908년에는 무려 900명으로 늘어났다. 안의와 선교사의 사경회 운동은 그 후 여러 대상자들을 구분하여 실시하여 대구성경학원과 계성학교 등의 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중략)

http://www.ccmm.news/news/articleView.html?idxno=1171 

 

[역사칼럼] 복음의 연쇄반응을 일으킨 선교사 안의와(安義窩) - 교회네트워크신문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우리 속담도 있지만,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은 온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답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사람의 영혼을 울리고 변화시켜 구원해주는 능력이 있다. 그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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